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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 링 위에서 인생을 발견하다

MS model 2009. 11. 13. 08:54

In Fighting Ring Life Goes on
링 위에서 두 명의 선수가 충돌한다. 펀치도 있고 킥도 있고 KO도 있으며 승자와 패자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봐야 할 것은 바로 링 안에 담긴 인생이다. 그것도 살 떨리고 뼈아픈 인생의 진리다.

경기장으로 들어가 K-1 링 옆에 섰다.
링은 TV에서 보던 것보다 더 넓어 보였다. 링사이드를 사방에서 두르고 있는 로프 역시 더 단단해 보였다. ‘이 로프가 출렁일 정도로 선수들은 충격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링 옆으로 피와 땀방울이 튄다. 그리고 방송으로는 들을 수 없는 선수들의 작은 신음소리도 들린다. 이렇게 K-1의 링 안에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고 있는 모습과 또 다른 진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와아~!”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큰 함성이 들린다. 파란색과 빨간색 조명이 현란하게 교차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2009년 9월 26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은 지금껏 이랬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손을 대면 데일 것만 같았다. 경기장 안의 1만5천 석의 좌석은 물론 의자를 이용해 따로 만들어놓은 VIP석까지 가득 메운 관객들을 이토록 열광하게 만든 것은 바로 파이터들의 화끈한 펀치와 킥이었다.

그렇다. 이날은 입식격투기의 최고봉 K-1의 월드 그랑프리 16강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K-1의 중요 경기가 우리나라에서 열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흥분할 일이지만 이날은 단순히 그뿐이 아니었다. TV 중계로만 봐도 주먹에 잔뜩 힘을 주고 소리 지르게 만드는, K-1 올스타라고 해도 모자랄 최고의 선수 모두를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경기장 안의 모든 관객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관객들은 마치 선수들과 한 몸이 된 것처럼 그들의 몸짓에 환호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했으며 분노하고 슬퍼했다. 링 안팎을 꽉 채운 모두가 파이터였다. 그리고 모두가 승자이자 패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선수들의 승부는 그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기로 끝나지 않았다. 3분씩 3라운드, 연장 라운드를 진행해도 10분이 조금 넘는 날리고 있고 응원하는 선수가 밀리라 치면 코치라도 된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소리를 지르기 일쑤다. 이러니 K-1 월드 그랑프리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취재 때문에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평소 좋아하던 파이터들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풀 대로 부푼 기대감을 안고 경기장 앞에 도착하니 ‘나만 이렇게 들뜬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팬들이었다. 경기를 보기 위해 일부러 일본에서 날아온 팬이 있는가 하면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수건을 하늘 높이 들고 있는 서포터즈들도 있다. “남자라면 K-1 아닙니까.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K-1의 사각 링은 분명히 인생을 담고 있었다.

모두의 축제가 되다
골수부터 격투기 팬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프라이드 FC부터 현재 추성훈과 김동현이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UFC까지, 한 경기라도 놓치면 큰일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 정도다. 소파에 앉아서 TV로 경기를 볼 때면 어느새 허공에 펀치를 아드레날린이 팍팍 분비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 경기를 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떨립니다.” 바다 하리의 열성 서포터즈는 이렇게 자신의 설렘을 전했다. 응원하는 선수가 패배하면 아쉬워서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 섞인 질문에는 “당연히 아쉽기는 하겠지만 오늘 경기가 마지막은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기회는 무수히 많은데요 뭐. 하지만 워낙 강해서 절대로 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다른 여성 팬이 옆에서 거든다. “이기든 지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냥 즐기면 되죠. 벌써부터 이렇게 재미있는데요 뭐.”
그녀의 말이다. 함께 활짝 웃는 그들은 마치 운동회의 하이라이트 계주 달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초등학생 같이 들뜨고 즐거워 보였다.

우정과 싸움은 별개다
오프닝 파이트가 끝나고 드디어 16강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 경기는 K-1 그랑프리를 3번이나 제패한 바 있는 ‘플라잉 젠틀맨’ 레미 본야스키와 사람 잡는 타격가 멜빈 마누프의 경기. 신장 차이가 20cm나 나는 두 선수의 대결이었다. 둘 간의 이전 승부에서 멜빈 마누프가 두 번이나 패배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레미 본야스키의 낙승을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시합은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승부 앞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깡패 잡을 때 이 자식이 세상 마지막 깡패라고 생각하고 잡는다’라고 말하는 강철중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 앞에는 오직 쓰러뜨려야 할 상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시합 전날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그들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전혀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사를 하거나 얘기를 나눌 때도 정중하고 가끔은 친구 같다는 인상을 줄 정도였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부적절한 돌발행동으로 인해 악동으로 불리는 바다하리는 많은 팬들로 하여금 ‘선수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이날은 가장 활달하고 밝은 모습을 보였다. 이전 대회에서 경기를 펼쳤던 대선배 피터 아츠와 기자회견 내내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으며,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로 들어가면서는 그의 중요부위를 가격(?)하는 듯한 장난을 치고 아이처럼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링 위에서다. 시합이 끝나면 그들은 친구가 된다. 이렇게 정확한 공과 사의 구분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가끔은 신기할 정도다. 이런 완벽한 감정조절 덕분에 그들은 세계 톱클래스 파이터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친분에 휩싸여 시합을 그르치는 것도, 시합에서 남아 있던 앙금이 격투 전문 기자단이 짚은 8강 관전 포인트사적인 자리에까지 이어지는 것도 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자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진정한 프로다. 가슴이 아무리 뜨거워도 머리는 차가울 필요가 있는 법이다.

FIGHTING TALK
K-1 파이터처럼 강해지고 싶은 당신을 위한 신체 단련법
K-1 훈련법
이날은 그랑프리 16강 경기 외에도 스페셜 파이트 경기도 있었다. 이 경기에서 당당히 타힐 멘치치를 꺾은 국내 최강 K-1 파이터 임치빈. 그와 그가 속해 있는 칸짐의 김세일 관장이 파이터들의 리얼 훈련법을 공개한다. K-1 선수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당신도 도전해보라.

1 주먹 주먹 쥔 손의 손등과 직각을 이루는 손가락 마디 부분이 강해야 한다. 이 부분을 ‘정권正拳’이라 부른다. 또한 손아귀 힘도 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바벨이나 덤벨을 이용해 리스트 컬과 리버스 리스트 컬을 실시한다. 기본적으로 손목과 전완근을 단련하는 운동이지만 손아귀 힘도 함께 기를 수 있다. 정권은 샌드백을 연속으로 치는 훈련으로 단련 가능하다.
2 어깨 강한 어깨는 파괴력 있는 펀치와 직결된다. 어깨 힘이 주먹까지 전달되어야 상대방에게 충격을 주는 펀치가 가능한 법이다.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가 큰 운동은 바로 친업과 풀업. 팔을 넓게 벌려 봉을 잡은 상태에서 몸을 끝까지 내렸다 최대한 끌어올린다.
3 하체 공격과 방어를 위한 하체 단련은 필수. 허벅지는 로우킥 공격에 견딜 수 있게 단련하고 정강이 부위는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도록 강화해야 한다.
스쿼트와 런지 외에 단단한 샌드백이나 훈련용 미트를 강하게 차는 방법으로 훈련한다. 정강이 부위를 병이나 봉으로 미는 훈련은 잘못된 방법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4 허리 펀치와 킥을 날릴 때 모든 힘이 허리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 익스텐션과 같은 허리 운동을 실시한다. 하지만 근육이 많이 생기면 뻣뻣해지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복근 운동과 킥 연습만으로도 충분히 허리를 단련할 수 있다.
5 복부 복부는 계속 공격당할 경우 몸이 급격히 피로해지기 때문에 단련은 필수다. 안정적인 호흡을 위해서도 단단한 복부는 꼭 필요하다. 싯업, 크런치 등의 운동으로 복부를 단련한다. 복부에 강하게 힘을 주고 연속적으로 펀치를 받아내는 훈련도 실전감각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다.



유명세는 괜한 것이 아니다
레미 본야스키와 멜빈 마누프의 경기가 레미의 판정승으로 끝나고 다음 경기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합이 진행될수록 무언가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바로 ‘의외성의 부재’였다. 의외성은 스포츠를 더 극적이고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다. 모두가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한 약자가 이기거나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한 플레이가 실현되었을 때 우리는 열광하지 않는가. 이날의 경기들이 밋밋하게 느껴진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의외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롤 짐머맨, 루슬란 카라예프, 세미 슐트 등 상대전적에서 앞서는 선수나 예전부터 강한 기량을 선보여 온 전통 강호가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대로 무난히 승리했다. 큰 기대를 모았던 그랑프리의 신예 싱크 하트 자디브와 자빗 사메도프가 각각 에베르톤 테세이라와 바다 하리에게 크게 힘써보지 못하고 패배한 것이 가장 아쉬웠다. 물론 경기 내용 자체가 지루하거나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결과가 너무도 예상범위 내였다. 많은 팬들이 기존의 강한 파이터가 KO를 당하는 이변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이날 이변다운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만 보면 이러한 결과는 유명 선수의 이름이 그저 이름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그냥 이름값일 뿐이야”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날의 경기 내용과 결과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강하고 노련한지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격투기에서는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 명성은 존재하기 힘들다. 경쟁자와 간접적으로 비교되는 것이 아닌 직접 부딪히는 정면승부이기 때문이다.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링 안에서 실력이 없다면 명성은 바랄 수도 없을뿐더러 도태되기 십상이다.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선배는 선배’라는 말은 적어도 K-1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배’라는 말만 통할 뿐이다.

FIGHTING TALK
격투 전문 기자단이 짚은 8강 관전 포인트
K-1 월드 그랑프리 결승전 8강
이제 겨우 16강 경기가 끝났을 뿐이다. 진짜 시합은 이제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년 12월 6일 일본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펼쳐질 8강 경기를 상상하면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린다.

[1경기] 루슬란 카라예프 vs 바다 하리 “루슬란이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한다 해도 최근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바다 하리를 이기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루슬란이 바다 하리의 공격을 어떻게 방어하느냐가 관건이다.”
[2경기] 알리스타 오브레임 vs 에베르톤 테세이라 “테세이라가 이번 16강전 경기에서 보여준 경기력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오브레임의 파워가 점차 강해지고 있고 상승세까지 타고 있어 오브레임의 우세가 점쳐진다.”
[3경기] 제롬 르 밴너 vs 세미 슐트 “세미 슐트는 이미 제롬을 세 번이나 이긴 바 있다. 제롬이 피터 아츠처럼 슐트를 쓰러뜨리는 이변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물론 있다. 하지만 슐트를 꺾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4경기] 에롤 짐머맨 vs 레미 본야스키 “최근의 연승으로 짐머맨도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안정적인 레미의 파워에는 밀리지 않을까 한다. 짐머맨은 종반까지 경기 운영이 탄탄한 레미를 초반부터 밀어붙여야 할 것이다.”

링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이날의 6경기는 무관의 제왕 제롬 르 밴너와 2003년과 2004년 그랑프리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무사시의 싸움이었다. 무사시에게는 물론 K-1을 오랫동안 지켜본 팬들에게는 의미가 큰 경기였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무사시가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K-1을 대표하는 파이터로 터줏대감 역할을 톡톡히 해오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사시는 입장할 때부터 비장한 표정이었다. 경기 시작 후에도 마찬가지. 그 어느 때보다도 시합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경기를 꼭 이기고 싶어 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승패와는 상관없이 팬들에게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이려는 목적의 집중이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뭉클했을 것이다. 결국 경기는 한 차례 다운을 빼앗긴 무사시의 판정패. 그의 마지막 공식전이 끝난 것이다. 15년간의 선수 생활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경기가 끝나자 제롬 르 밴너는 무릎을 꿇고 무사시에게 절을 한 후 그의 손을 번쩍 들어올려주었다. 무사시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수많은 팬들도 그와 함께 울었다. “15년 동안 비교적 잘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 혼자가 아니었죠. 저를 도와준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싸워온 세월에 후회는 없습니다. 만족하고 있죠.” 경기를 마친 무사시의 말이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물러날 때가 언제인지 알고 물러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끝내는 시기가 아니라 그때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무사시의 은퇴는 분명 아쉽지만 안타깝지 않은 이유는 그가 후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떤 이유로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든 후회는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매순간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K-1의 링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